이란 전쟁 이후 이어진 국제유가 급등이 미국 경제 내 계층 간 격차를 더욱 확대시키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16일(현지 시각)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최근 미국 소비자들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휘발유와 디젤 구매에 약 450억달러를 추가로 지출한 것으로 나타났다.
에너지 비용 상승 부담이 저소득·중산층 소비자들에게 집중되는 반면, 에너지 기업 투자자들과 고소득층은 오히려 수혜를 보고 있다는 것이다.
시장에서는 이번 유가 충격이 단순한 물가 상승을 넘어 미국 경제 내부의 부의 재분배 구조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 “부자는 벌고 서민은 부담”…유가가 키운 격차
미국 매사추세츠대 애머스트 캠퍼스의 이사벨라 베버 경제학 교수는 유가 급등을 사실상 ‘부의 이전 현상’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미국이라는 국가 전체로 보면 에너지 수출 확대의 혜택이 있을 수 있지만, 실제로 혜택을 받는 것은 극소수 부유층”이라며 “대부분의 국민은 오히려 훨씬 큰 비용 부담을 떠안고 있다”고 지적했다.
베버 교수 연구에 따르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미국 에너지 기업들이 기록한 막대한 이익의 약 50%가 상위 1% 부유층에 집중된 것으로 분석됐다.
실제로 이번 유가 상승 국면에서도 에너지 기업 주주와 금융자산 보유층은 상당한 수익을 거두고 있는 반면, 일반 소비자들은 연료비와 생활비 상승 압박에 직면하고 있다.
▲ 에너지 기업 호황…주식시장 랠리 뒷받침
유가 급등은 미국 에너지 기업들의 실적 개선으로 직결되고 있다.
올해 들어 S&P500 에너지 업종은 32% 상승하며 증시 상승세를 견인하고 있다.
엑슨모빌, 셰브런, BP, 쉘, 토탈에너지 등 주요 에너지 기업들의 1분기 잉여현금흐름(FCF)은 전분기 대비 84% 급증한 360억달러를 기록했다.
중소형 미국 석유·가스 기업들의 현금흐름 역시 53% 증가한 170억달러 수준으로 집계됐다.
특히 시장에서는 호르무즈 해협 봉쇄 우려가 장기화될 경우 유가 추가 상승 가능성이 커지면서 향후 배당 확대와 자사주 매입 증가 기대감도 높아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AI 중심 기술주 랠리에 더해 에너지 업종 강세가 미국 증시를 추가로 밀어올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 소비 위축 시작…저소득층 타격 본격화
반면 일반 소비자들의 부담은 빠르게 커지고 있다.
미국 원유 가격은 4월 이후 배럴당 평균 99달러 수준으로 지난해보다 59% 상승했다.
항공업계만 해도 올해 3월 제트연료 비용이 전년 대비 약 13억달러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JP모건은 현재 수준의 유가가 2026년까지 유지될 경우 미국 소비자들의 연간 연료비 부담이 지난해보다 1720억달러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디젤 비용 증가분은 포함하지 않은 수치다.
특히 저소득층 소비 위축 조짐이 이미 나타나고 있다.
뱅크오브아메리카 연구에 따르면 중·고소득층은 항공·숙박·관광 소비를 유지하거나 늘리고 있지만, 저소득층은 소비를 줄이기 시작했다. 패스트푸드 체인 윙스톱과 전당포 업체 Ezcorp 등 저소득층 고객 비중이 높은 기업들도 최근 실적 발표에서 유가 부담에 따른 소비 위축을 언급했다.
▲ “셰일혁명 시대 끝났다”…고용 효과 제한적
과거와 달리 유가 상승이 미국 내 대규모 일자리 증가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도 특징으로 꼽힌다.
한때 셰일혁명 당시에는 유가 상승이 텍사스와 노스다코타 등 산유 지역 일자리 급증으로 연결됐지만, 현재는 상황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베이커휴즈에 따르면 미국 원유 시추 장비 수는 최근 1년간 11% 감소했다. 노동부 통계에서도 미국 석유·가스 채굴업 고용은 1972년 이후 최저 수준 근처에 머물고 있다.
업계에서는 자동화와 시추 기술 발전으로 생산 효율이 크게 개선되면서 과거처럼 인력 중심의 호황이 재현되기 어려운 구조가 형성됐다고 보고 있다.
즉, 유가 상승 이익은 기업과 투자자에게 집중되는 반면 노동시장 파급효과는 제한적인 구조라는 의미다.
▲ “고소득층은 버틴다”…소비 격차 확대
뉴욕 연방준비은행(Fed) 연구에 따르면 연료가격이 급등했던 3월, 연소득 12만5000달러 이하 가구는 주유량 자체를 줄인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고소득층 운전자들의 연료 소비는 거의 줄지 않았다. 이는 2022년 유가 급등 당시 고소득층까지 소비를 줄였던 흐름과 다른 모습이다.
뉴욕 연은의 맥심 핀코브스키 경제연구 자문위원은 “현재 고소득층은 금융자산 증가로 순자산 규모가 크게 늘어난 상태”라며 “이 때문에 유가 상승 충격을 상대적으로 덜 받고 있다”고 분석했다.
시장에서는 결국 이번 유가 충격이 미국 경제를 ‘금융자산 보유층’과 ‘생활비 부담층’으로 더욱 분리시키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 트럼프 정부 부담 확대…소비심리 악화 변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 에너지 가격 인하를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지만, 최근 유가 급등으로 소비자 불만이 커지고 있다.
현재 미국 소비자심리지수는 역대 최저 수준 중 하나로 평가될 정도로 악화된 상황이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에너지 수출 증가가 경제적 이익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향후 중동 정세와 호르무즈 해협 상황, 미국 소비 둔화 여부가 글로벌 경제 흐름에 핵심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유가 고공행진이 장기화될 경우 미국 경제의 소비 기반 자체가 약화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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