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에 회부된 '재판소원 1호' 사건인 녹십자 과징금 소송과 관련하여 피청구인 답변서를 제출하지 않기로 최종 결정했다. 이는 사법부 수장이 헌법재판의 당사자로서 특정 논리를 주장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중립성 논란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조치다. 헌법재판소는 답변서 미제출이 직권 심리 원칙상 전체적인 사건 판단과 심리 일정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대법원이 헌법재판소에서 심리 중인 이른바 재판소원 1호 사건에 대해 피청구인 자격으로 제출해야 할 답변서를 내지 않기로 방침을 정했다. 사법부의 판단이 헌법재판의 대상이 된 상황에서 대법원이 직접 반박 의견을 내는 것이 법원의 객관적 지위를 저해할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이번 결정은 재판소원 제도 도입 초기 단계에서 사법부 간의 권한 경계와 중립성 가치를 정립하는 중요한 선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사건의 발단은 녹십자가 백신 구매 입찰 담합을 이유로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부과받은 20억 원의 과징금 처분에서 비롯되었다. 녹십자는 해당 처분에 불복하여 행정 소송을 제기했으나 대법원은 본안에 대한 구체적인 심리 없이 심리불속행 기각 판결을 내려 패소를 확정했다. 그러나 이후 진행된 관련 형사 사건에서 녹십자 측이 최종 무죄 판결을 받으면서 행정 판결의 정당성을 둘러싼 법적 논란이 점화되었다.
녹십자는 형사 무죄라는 상반된 결론이 나왔음에도 대법원이 행정 사건을 심리불속행으로 종결한 것은 헌법상 보장된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이라며 재판소원을 청구했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4월 28일 이 사건을 전원재판부에 회부하고 이튿날 대법원장에게 회부 사실을 통지하며 답변서 제출을 요청했다. 대법원은 답변서 제출 기한인 6월 4일까지 별도의 의견서를 제출하지 않는 방식으로 대응 수위를 조절했다.
법원 내부에서는 대법원이 피청구인으로서 녹십자의 주장에 반박할 경우 자칫 소송 상대방인 공정거래위원회의 편을 드는 것으로 오인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하고 있다. 법원 관계자는 "현재로서는 법원이 답변서를 내는 것이 중립적인 입장을 해치는 것으로 비칠 우려가 있어 오늘까지는 제출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사법부의 권위와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특정 당사자의 논리에 가담하기보다 제3자의 위치를 고수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취지다.
만약 헌법재판소가 대법원의 판결을 취소하는 결정을 내릴 경우 해당 사건은 다시 법원의 심리 단계로 환송되어 재심 절차를 밟아야 한다. 대법원이 미리 제출한 답변서가 향후 다시 진행될 심리 과정에서 재판부의 판단을 구속하거나 불필요한 가이드라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도 이번 결정의 배경이 되었다. 법원은 재판소원 제도 시행 초기인 만큼 우선적인 추이를 살피며 신중하게 대응하겠다는 입장이다.
헌법재판소는 대법원의 답변서 미제출이 심리 진행에 결정적인 장애 요인이 되지는 않는다는 실무적 판단을 내놓았다. 헌재 관계자는 "헌재는 직권 심리를 하기 때문에 제출된 자료만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답변서가 없다고 해서 심리에 지장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답변서는 재판부의 판단을 돕는 참고 자료의 성격을 가질 뿐이며 헌법재판소는 자체적인 법리 검토를 통해 사건의 본질을 규명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일각에서는 사법부 간의 원활한 소통과 제도적 안착을 위해 법원이 보다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해야 한다는 비판적 시각도 일부 존재한다. 재판소원 제도가 국민의 기본권 구제를 목적으로 하는 만큼 최고 법원 간의 긴밀한 법리적 논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법치주의의 근간인 사법 중립성과 법적 안정성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절차적 신중함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보수적 법조계의 논리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현재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에는 이번 녹십자 사건 외에도 사전심사를 통과한 재판소원 사건 5건이 추가로 계류되어 심리를 기다리고 있다. 대법원은 나머지 사건들에 대해서도 이번 결정과 동일하게 중립성 훼손 여부를 면밀히 검토하며 대응 방향을 결정할 계획이다. 향후 법원이 적극적으로 설명해야 할 특별한 상황 변동이 발생할 경우에는 추후 답변서를 제출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다.
이번 사안은 대한민국 사법 역사상 처음으로 시행되는 재판소원 제도의 실질적인 운영 원칙과 최고 사법기관 간의 관계 설정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대법원의 답변서 미제출 결정은 사법권의 독립과 재판의 중립성을 지키기 위한 고육지책이자 원칙적인 대응으로 평가된다. 향후 헌법재판소가 내놓을 최종 판단은 향후 재판소원 제도의 향방과 사법부의 심리 관행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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